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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오산의 문화재

 

오산의 역사는 아주 먼 선사시대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청동기시대에 촌장의 무덤을 잊지 않으려 만든 고인돌이 우리 고장의 귀한 유물로 남아있습니다. 현재 우리의 풍요로움이 선조들의 지혜와 땀의 결실이라 생각할 때, 수 천년을 이어 온 우리 고장의 귀중한 역사와 뿌리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지역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해야 할 것입니다우리는 선조들의 귀중한 사료를 발굴하고 보존하여 후세에 전할 의무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에 오산문화원은 오산의 향토유적 및 문화재를 시민들이 쉽게 이해하고 더 많은 관심과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영상기록물로 남기고자 합니다오늘 우리의 이 작은 노력이 오산의 역사와 문화전통을 바로 알려 역사와 전통이 살아 숨쉬는 문화도시 오산의 초석이 되길 기원해 봅니다.

 

그럼 지금부터 오산의 역사·문화 기행을 시작 해 보겠습니다.

 

1. 독산성

독산성은 오산시 지곶동에 위치한 208미터의 독산 산봉의 7~8부 능선을 둘러쌓은 테뫼식 석축산성입니다. 둘레는 복원성벽을 기준으로 1,095미터이고 면적은 약 37,269제곱미터 입니다.

 

산성에는 성문 4개소 및 암문 1개소, 8개소, 보적사, 세마대 등의 시설이 있으며, 국난극복의 상징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64829일 사적 제140독산성 및 세마대지로 지정되었으며, 이후 2011728오산 독산성과 세마대지로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

 

독산성은 수원과 오산, 화성시에 펼쳐진 평야 가운데 우뚝 솟아 사방을 멀리 관망할 수 있는 지정학적 요충지입니다.

 

서북쪽으로 4km 정도 떨어진 화산(花山)에는 융릉과 건릉이 위치하고 있으며, 성황산 아래로 용주사(龍珠寺)가 내려다보입니다.

 

독산성에 대한 역사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처음 등장합니다.

 

기원전 8, 독산에 목책을 설치하였다는 사실 외에 독산(禿山)으로 기록된 곳에서 삼국 간에 여러 차례의 전투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의 위치가 어느 곳인지는 불분명한 상태입니다. 또한 고려시대에 독산성과 관계된 기록이 전혀 없어 독산성의 역사적 변화를 추적하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2. 세마대

독산성에는 임진왜란 당시 권율장군이 쌀로 말을 씻는 세마전법으로 독산성을 에워싸고 있던 일본군을 퇴각하게 한 전투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기념하여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의 명에 따라 독산성 정상에 세운 장대가 바로 세마대입니다.

 

왜군은 독산성 주위 3곳에 진을 치고 고립시킨 다음 공격해 왔지만, 권율은 매복과 기습전을 펼치며 성문을 닫고 지켰습니다.

 

지형적인 조건으로 성안에는 물이 부족하여 극심한 식수난을 겪고 있었고 이를 간파한 적장은 부하에게 물 한 지게를 지어 산위에 있는 권율에게 갖다주어 투항을 권유했습니다.

 

하지만 권율은 즉시 성 아래의 적군이 잘 볼 수 있는 높은 곳에 올라가 흰 쌀을 말 위로 쏟아 붓게 했습니다.

 

멀리서 그 광경을 본 왜군은 말을 물로 씻기는 걸로 보였고, 물이 풍부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독산성에서 대치하며 전의를 상실하고 있던 왜군은 남부지방에서 모여든 의병들이 후방에서 포위망을 좁혀오자 마침내 포위망을 풀고 한양으로 퇴각하게 됩니다.

 

 

3. 보적사(寶積寺)

독산성 동문에 위치한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 용주사의 말사이며, 1988727일 전통 사찰 제3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보적사라는 명칭은 화성지에 처음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보적사 혹은 세마사는 임진왜란 이후 창건되어 오산지역 불교의 중심지였으며, 1899년에 편찬된 수원군읍지에 보적사가 기록된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까지 영위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987년 도광 정운스님의 불사 때 석가여래불을 모신 정면 3, 측면 2칸의 중창정전이 건립되면서 대웅전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내부에는 석가여래좌상, 지장보살좌상, 약사여래상과 16나한 및 후불탱, 산신탱, 칠성탱의 불화와 범종이 있습니다.

 

대웅전 좌우는 요사채 2동이 있으며, 대웅전 정면에 3층 석탑이 위치하고, 석가세존진신사리 봉안공덕비, 2기의 석등 등으로 가람이 구성되어 있어 전통 사찰의 면모를 갖추었습니다.

 

 

오산의 고인돌

오산의 고인돌은 경기도기념물 제112호로 지정되어 있는 금암동 고인돌군과 경기도기념물 제211호로 지정되어 있는 외삼미동 고인돌이 널려 알려져 있습니다.

 

이 외에도 가장동, 수청동, 지곶동, 탑동·두곡동에도 고인돌이 분포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지만 금암동과 외삼미동 고인돌, 가장동, 지곶동 이외에 다른 고인돌들은 대부분 사라지고 현재 남아 있지 않습니다.

 

4. *오산 금암동 고인돌 유적(경기도지정문화재 112)

금암동 일대와 주변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고인돌군으로서 총 11기가 확인되는데, 현재 제1호에서 9호까지가 경기도기념물 제11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 외 2기는 추정 고인돌입니다.

 

현재 금암동 고인돌공원 내에 일부가 포함되어 있으며, 나머지는 인근에 분포하고 있습니다. 해발 81m의 구릉에서 동쪽으로 내려오는 평탄지에 1, 2, 3, 4, 그리고 추정 11호가 위치하고 있으며, 구릉 남사면에 5, 6호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5. * 오산 외삼미동 고인돌

외삼미동 고인돌은 북오산 톨게이트에서 북쪽으로 200m 떨어진 지점의 완만한 구릉에 위치하며 2기의 고인돌이 있습니다.

 

1호 고인돌은 변형 탁자식 고인돌로 덮개돌과 받침돌이 잘 남아 있습니다.

 

덮개돌의 장축은 남북방향이며, 평면 형태는 장방형입니다. 덮개돌 윗면은 편평한 편이고 중앙에서 북쪽부분으로 치우쳐 성혈 10개가 있습니다.

 

덮개돌 아래에는 장방형의 받침돌이 동쪽과 서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2호 고인돌은 1호 고인돌에서 남쪽으로 2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개석식 고인돌로 평면형태는 삼각형에 가까우며 크기는 가로174 세로140 높이30cm입니다.

 

덮개돌은 두께가 얇고 편평한 편이며 북쪽과 서쪽 측면은 매끈하게 다듬어져 있으며 재질은 1호 덮개돌과 동일한 화강암계통입니다.

 

 

6. 오산화성궐리사(烏山 華城闕里祠)

지정 명칭은 오산시 궐리사이며 1994420일 경기도 기념물 제147호로 지정되었고, 궐동 147번지 일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궐리는 노나라 곡부에 있는 마을로 공자가 살던 곳이며, 궐리사는 공자를 배향한 사당입니다. 우리나라로 유입된 공씨들이 많이 모여 살던 지역에 가묘(家廟)형태로 건립되기 시작했습니다.

 

오산의 궐리사는 공서린이 정착하였던 마을에 세워졌으며, 논산의 노성궐리사와 달리 관()의 주도로 중건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조의 이런 부정적 시각은 다음 해 수원부에서 공씨 집성촌이 알려지고, 그곳이 기묘명현 공서린이 낙향하여 정착한 곳이라는 사실이 확인된 뒤 변하게 됩니다.

 

공씨 후손 등용에 대한 정조의 단호한 태도에 신하들이 헌의한 결과, 기묘명현으로 이름난 공서린의 후손을 찾아 녹용하는 것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정조는 그로부터 5일 뒤에 경기도 관찰사를 시켜 수원 오산의 구정촌(九井村)에 있는 성묘유지(聖廟遺址)의 도상을 그려오게 하는 한편, 용인에 있는 공서린의 직계 후손을 찾아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정조는 예외적으로 수원에 궐리사 창건을 지시하였습니다.

 

정조는 경기도 관찰사에게 명하여 궐리사 영건을 감독하게 하고 성상(聖像)을 편히 모시게 했으며, 내각(內閣)에 있는 공자 영정과 영당에서 본래 봉안해 오던 영정을 함께 간직하게 했습니다.

 

이름은 궐리사라 하고 편액을 정조가 직접 써서 내려주었으며, 춘추(春秋) 제향에 쓸 향축을 지방관에게 내려 보내서 제사하도록 했습니다. 제향에 올릴 사품(祀品)은 니성궐리사의 예를 따르되 정약(精約)하게 하라고 할 정도였으니 실질적으로 관에서 설립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공자의 사당인 오산화성궐리사는 정면 3, 측면 2칸의 익공식 건물이며, 공부자문화전시관과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학문을 논하던 곡부의 행단을 본따 궁궐식 양식으로 세운 행단, 그리고 강학당인 인성학당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7. 오산화성궐리사 성적도(烏山 華城闕里祠 聖蹟圖)

오산시 화성궐리사에 보관되어 있는 성적도 목판은 공자의 생애(生涯)를 그림으로 나타낸 것으로, 공자의 76대손인 공재헌(孔在憲)이 궐리사 도약장 조병식, 송병선 이 1904년 중국 산동성에 있는 성적도를 가져와 이를 저본으로 하여 새긴 것입니다.

 

1974926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공자님 평생의 언어와 동정과 형용과 위의가 담겨져 있으며, 수천 년 전의 성인의 뜻을 널리 알리기 위한 의도로 만들었습니다.

 

목판은 피나무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전체 수량은 60장이며, 한 장의 크기는 세로 32, 가로 60, 두께 4내외입니다.

 

글씨는 1cm 정도이고 정교하지 못하나 판장에 조각된 공자의 성적도는 비교적 섬세한 편입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유일한 공자의 성적도라는 점이 인정되어 경기도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이 목판을 이용하여 책을 여러 번 찍어낸 것으로 보이며,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가는 상황에서 공자의 일생과 유학을 널리 알리기 위한 교재로서 간행된 것으로 보입니다.

 

 

8. 봉학교비(鳳鶴橋碑)

황구지천 제방 아래의 밭에서 발견하여 한신대학교 박물관이 세람교지 현황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확인되었습니다.

 

현재는 한신대학교 박물관으로 이전하여 전시하고 있습니다.

 

봉학교비는 오산시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봉학교비는 봉학교가 홍수 등 어떠한 이유로 무너진 후 보수작업을 진행하면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데, 비의 내용을 보면 관청(官廳)이 아닌 승려가 공사를 주도하였고, 민가에서 시주하여 자금을 조달하였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더불어 봉학교라는 명칭은 문헌자료에서 확인되지 않는데, 비가 출토된 위치와 맥락으로 볼 때 세람교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9. 변응성 선정비(邊應星 善政碑)

변응성(1552~1616)은 선조시절 공조판서 겸 도총관 변협의 아들입니다.

 

선조 12(1579) 무과에 급제한 이후 임진왜란(1592) 때 경주부윤으로 임명되었으나, 왜군이 경주를 점령하여 부임하지 못하였습니다. 이후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의 천거로 경기방어사가 되어 경기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약하였습니다.

 

선조 35(1602) 임진왜란이 끝난 후 독산성(禿山城)을 석성(石城)으로 수축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광해군 때에는 훈련도감 대장, 한성부 좌윤(左尹)까지 승진하였습니다.

 

변응성선정비는 오산시향토유적 제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건립연도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선정비는 독산성 밖 서쪽 주차장에 입구 근처에 있었으나, 독산성 보수 공사 때 주민들에 의하여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습니다.

 

 

10. 이상재 충신 정려문()

오산의 서동에는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을 향해 진군하던 중 전사한 충신 이상재(李尙載, 1607~1636)의 정려각(旌閭閣)이 있으며, 오산시 향토유적 제3호로 지정되어 있고, 이상재선생의 묘는 향토유적 제4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상재는 인조 8(1630)에 진사가 되고, 인조 11(163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어 저작에 올랐으며, 인조 14(1636)에는 금정도찰방(金井道察訪)에 임명되었습니다. 이해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충청도관찰사 정세규(鄭世規)의 종사관으로 출정하여, 인조가 피난한 남한산성을 향하여 진군하다가 용인에서 적의 협공을 받아 전사하였습니다. 이후 숙종 때에 교리에 추증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이상재 선생에게 내려진 충신 정려각이 내려졌고, 이를 보관하는 정려문은 1815(순조 15)에 정면 두칸, 측면 한칸의 크기로 건축되었습니다.

 

전면에서 보면 우측에 이상재충신정려문 정판이 위쪽에 있고, 정판 밑으로 송면재가 지은 정려기 현판 1좌가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 정려각은 좌측에 협간을 두어 선생의 신위를 모신 감실이 있고 감실 입구는 널빤지로 된 판장문으로 마감하였습니다.

 

지붕은 한식 골기와를 얹은 맞배지붕이며 겹처마로, 단청을 하지 않은 백골집에다 좌우에 바람을 막는 방풍판이 있습니다. 건축 양식으로 볼 때 협간을 둔 정려각은 흔치 않은 양식입니다.

 

이 정려각은 최근에 재건축된 것으로 우측칸에는 좌, 우측 벽면에 각각 백호, 청룡의 벽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지금까지 오산지역의 유물과 문화재를 살펴보았습니다.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자랑스러운 문화재도 있고, 관리가 잘 되지 않아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유물도 있습니다.

귀중한 유물과 문화재를 찾고 관리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와 문화재를 후세에 알리고 전달하는 일도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을 가질 때만 가능합니다.

 

오늘 우리가 시작하는 지역문화 영상기록물이라는 이 작은 발걸음이 오산지역의 유적과 문화재를 바로 알고 후세에 자랑스러운 유물로 남기며, ‘문화도시 오산의 기틀이 되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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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 운천초등학교, 지역 맞춤 교육으로 특화 된 지역인재 키워낸다

오산의 한 초등학교에서 지역 교육현실의 문제를 고민하고 이에 맞는 교육프로그램 운영과 AI 디지털 선도교육을 실시하며 교육도시 오산의 이미지에 걸맞는 다양한 교육프로그램들을 선보이자 인근 학교와 학부모들 사이에 큰 화제가 되고 있다. 오산 운천초등학교(교장 양인숙)에서 운영하고 있는 ‘기초학력 보장 책임지도’ 프로그램과 ‘AI 디지털 교육’이 그 관심의 주인공으로 2023년부터 각자 주제에 걸맞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운영하고 있다. 학교는 먼저 각 학생별 학력차가 크게 나는데도 특별한 대책과 프로그램이 없는 문제를 파악하고 2023년 3월부터 현재까지 이를 보완 할 다양한 프로그램 개발을 통해 ‘기초학력 보장 책임지도’에 힘쓰고 있다. 먼저 학년 초, ‘학습지원대상지원 협의회’를 구성하여 진단평가, 담임과 학부모 상담, 담임교사 추천 등을 통해 교과학습 부진학생과 기초학습 부진학생을 판별하여 그 학생들을 대상으로 ‘기초탄탄 캠프’, ‘두드림 학교’, ‘교과보충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대상 학생들에게 학습지원과 함께 정서지원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기초탄탄캠프’는 방과 후 프로그램으로 국어, 수학의 기초학력이 부족한 학생을 중심으로 저학년(1~3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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